무엇이 그렇게까지 너무나 미안한 일인가?
그날은 책읽고 토론하는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려 이미 땅을 적셨고 간간이 비가 오다 그치다를 반복하였다. 중학생 큰 아이가 체육대회를 하는 날인데, 괜찮으려나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비오는 것도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책 모임에 가기 전,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기도 했고 가는 길이 아이 학교가는 길 너머에 있어서 체육대회를 구경하려고 아이 학교 옆의 시립 도서관 난간에 붙어 서서 운동장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이 운동장에 도열해 있는 모습이 보이고 연신 아이들에게 마이크로 주의사항을 전달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체육대회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그 때, 또다시 가랑비가 내렸다.
"뭐~ 이정도 비는.."이라고 생각하면서 멀리 아이들이 도열해 있는 학교 운동장 전체 모습을 찍어 우리반 학부모 반톡에 올렸다.
잠시 구경하다가 시계를 보고는 책읽고 토론하는 모임으로 가기 위해 만나기로 한 우리 모임 이끄미님을 만나 카풀하기로 한 장소로 갔다. 가는 중에 또 다른 책모임의 회원과 그의 지인들을 만났다. 매우 반가웠다.
"어디 가세요?"
또 다른 책모임 회원님이 물어봤는데, 갑자기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 설명이 길어지면서 마땅한 간단한 단어나 문장이 떠오르지 못했다. 나는 그저 웃고 손을 흔들며 길을 건넜다. 왜 그랬을까? 뭘 숨길 일도 아니고, 뭘 잘못한 일도 없는데 말이다. 간혹 머리가 선 듯한 이런 상황을 맞을 때마다 나이가 들긴 들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 엄마나 아빠가 들었으면 기분이 나쁜 말이거나 동조하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카풀을 해서 장소로 이동하였다. 이번에 만나는 카페 이름을 "일랑일랑"이었다. 향수나 오일로 유명한 식물의 이름으로 타갈로그어로 "야생"이라는 뜻이란다.
카페는 입구부터 옅은 베이지 색의 타일을 붙인 벽에 까만 테두리의 옛날 느낌의 등이 달려 있었고 카키와 풀색의 중간 쯤 되는 나무문에 유리가 끼워진 문 양 옆으로 키 큰 식물과 꽃들로 자연스러운 느낌을 자아냈다. 식물들이 문 양옆에 도열해서 나를 반기는 듯 했다. 카페의 내부는 모던하면서 정갈하면서 빈티지했다. 카페의 벽은 대략 반을 나누어서 아랫쪽은 벽돌을 쌓은 느낌이었고, 위쪽과 천장은 흰색으로 곳곳에 그림 액자가 걸려 있었다. 오는 사람들에게 모두 제공하는 차는 기계에서 직접 따라 마시게 되어 있었는데, 조작하는 법은 최신 정수기와 같았다. 물론 주문은 키오스크에서 해야한다. 쓰레기통도 터치하면 자동으로 통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이 있었다. 나무 테이블과 검은색 딱딱한 의자에 색색의 방석과 쿠션, 창마다 걸린 미색 커튼이 아늑함을 더했다.
우리 책모임이 자리잡은 테이블 오른쪽 뒤로 비슷한 크기의 약 10인용 테이블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장애아들과 보호자들이 앉아 있었다. 어느 아이가 약간씩 높은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놀랐다가 그다음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틱 같은 것이었으니까.
우리 책모임에서는 슬로우리딩으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책에 도전중이다. 대략 10개월에 걸쳐서 진행하고 있었다.
그 외 그림책을 하브루타에 입각하여 어떻게 아이들에게 소개하면 좋을지를 연구하는 모임이다. 그림책에 너무 문외한이지만, 이 모임 덕분에 글을 읽기 싫어한다면 100세가 되도록 지속적으로 그림책을 봐도 좋겠다는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훌륭한 그림책이 넘치도록 많을 줄이야! 이건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이렇게 우리 책모임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같은 영역까지 읽고 서로 질문하고 토론을 하고 있었다.
카페 일랑일랑의 샌드위치와 커피와 무료로 제공하는 차들은 아주 맛이 좋았다. 나는 책과 종이 등을 펼쳐놓느라 나의 무료로 제공하는 찻잔을 나의 오른쪽에서 먼 쪽으로 옮겨놓았다. 혹시 쏟아서 책을 적시거나 하는 상황에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한참 책모임 중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말했다. 나는 오른쪽을 돌아보며 "네?"라고 대답하였다. 저쪽에 와 있었던 장애아 중의 하나가 카페를 나서면서, 내가 나에게서 멀찍히 둔 나의 찻잔에 입을 대고 마셨던 것이었다.
"아~ 그랬구나,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 장애아의 보호자들은 연신 나에게 사과를 했다. 그런데 또 하고 또 했다.
나는 나의 큰 아이 만한 그 아이의 등에다 대고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미안해, 아줌마가 벌써 입댄 잔이었단다!!"라고.
대체 왜 이렇게까지 미안하다고 해야 할 일일까. 이 일을 겪으면서 나는 그냥 무어라 설명할 수 없이 서글펐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이 되었고 그날의 그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갑자기 더 서글펐다. 그저 그 아이의 부모와 보호자들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장애아의 부모나 보호자가 되면, 이게 이렇게까지 연신 사과를 하고 또 하고 또 해야 할 일일까?
유전이 아닌, 원인을 알 수 없는 장애는 일정 비율로 우리 호모 사피엔스에게 나타난다. 완전한 유전학 과학자는 아니지만, 배아가 생성될 때, 몇 만분의 1의 확률로 우연히 에러가 난댄다. 그렇다면, 누구나 장애아를 낳을 수도 있으며, 누구나 장애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확률을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일정비율로 장애가 나타나도록 설계되어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그 짐을 지고 있는 그들에게 더욱 더 감사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머리말에 언급하였듯이, 종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여전히 이 세계가 테러와 전쟁중인 것을 넘기 위해 차라리 과학을 제대로 배우는 것이 낫다고 하는 구절을 다시 한번 진중하게 생각해보게 한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머리말 p29, p30 중에서 -
과학의 성공은 자정 능력에 있다. 과학은 스스로를 교정할 수 있다.
이미 제시된 지혜에 대한 재평가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과학하기의 위력이며, 과학하기의 요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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